바울을 통하여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바울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머 리 말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영적 진리이기에 진리를 탐구하는 중에
성령의 조명을 받아 깨닫게 되지만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지면 곤란하다. 그래서 교회는 교리로 복음을 체계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사회적 요소, 전통적 요소, 문화적 요소를 고려하여 정하여 상황에 맞게 교리를 실천해 나간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질되었다. 로마의 정치적 결탁에 의해 세워진 교황의 영향력과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에 의한 방해와 헬라문화를 중심으로한
철학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요약하면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로 집약된다.
기독교는 정치 집단이 되었고, 고행성사 등 율법주의가 다시 스며들었으며, 구원과 돈 장사가 연계되었으며, 신앙은 형식적 의식에 매몰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정통 복음으로 가자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세웠다.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사회적 요소, 전통적 요소, 문화적 요소를 고려하여 정하여 상황에 맞게 교리를 실천해 나간다. 그러나
대부분 종교개혁 전으로 돌아간듯하다.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는 그대로 반영되었고 교회의 조직을 통해서 결정한 교리가 마치 성령으로 된 것처럼
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신학대학이 세워지고 더 체계화되어 등록된 교역자가
나오고 그들의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전파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오늘날 교리를 바탕으로 한 복음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면서 이와같은 일들을 잘 예견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유대 율법주의에 빠진 자였으므로 율법주의의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마다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특히 오늘날 성경이 각 나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류로 인해서 성경이 왜곡되는 점은 너무나 심각한 일이다
그리고 교리의 문제점을 몇가지 지적한다면, 삼위일체의 교리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됨을 설명해야 하는데, 성도를 빼고 하나님 중심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죄를 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는 시각에서 사람의 마음 속의 죄를 등한시한다. 부활을 육체가 죽은 후에 그 죽었던 육체가 부활하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영적
생명으로 부활하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수많은 교리가 문제가 있으나 다 지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읽으면서 초대 교회가 지향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바라는 마음이다.
2024. 4.
진리의 선교회
목
차
제1부. 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1
Ⅰ. 죄는 무엇이고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1. 죄의 정의/와 성령훼방죄 1
2. 세상 밖에서의 죄/ 4
3. 세상 안에서의 죄/ 7
4. 용서받을 수 없는 죄/ 8
Ⅱ. 율법과 율법주의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9
2. 율법 속의 그리스도/ 12
3.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루려는 율법주의자들/ 13
제2부. 믿음과 구원/ 17
Ⅰ. 믿음
1. 율법 아래 있는 믿음/ 17
2.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 19
3. 그리스도의 믿음/ 20
Ⅱ. 구원
1. 구원의 의미/ 22
2. 구원의 대상/ 25
3. 그리스도의 예정/ 26
4.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 31
5. 이스라엘과 이방인/ 32
제3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35
Ⅰ. 죽음의 의미
1. 죽는다는 것/ 35
2. 첫째 죽음/ 39
3. 둘째 죽음/ 40
Ⅱ.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1. 죄는 반드시 처벌한다/ 41
2. 속량/ 43
3. 어린양의 죽음/ 44
4.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47
5. 예수와 연합되어 죽은 자/ 47
Ⅲ. 죽음의 미하는 세례
1. 물세례/ 46
2. 불세례/ 47
제4부. 부활/ 51
Ⅰ. 그리스도의 부활
1. 첫열매/ 51
2.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52
Ⅱ. 성도의 부활
1. 성령세례와 성도의 부활/ 54
2. 옛사람과 새사람/ 56
3. 셋째하늘/ 58
4.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59
Ⅲ. 성도에게 주어지는 은사
1. 방언과 예언/ 64
2. 사랑과 성도간의 교제/ 66
3. 성도들의 권세/ 68
제5부. 복음 전파/ 70
Ⅰ. 복음 전파의 거점인 교회
1. 교회 공동체의 의미/ 70
2. 전도여행과 일곱교회/ 72
3. 교회 안에서의 분쟁/ 77
4. 교회 밖에서의 도전/ 79
Ⅱ.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파
1. 바울이 강론한 하나님 나라/ 85
2. 복음 전파내용인 하나님 나라/ 88
Ⅲ. 기독교 교리
1. 교리의 원칙/ 91
2. 목회자 교리/92
제1부. 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Ⅰ. 죄는 무엇이고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1. 죄의 정의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을 마음에 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처음 품은 자가 에덴동산에서 하와로 나타난다. 하와는
하나님 나라에서 악한 천사의 상징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나고자 한 것이 죄라는 의미이다. 유다서 1장 6절과 베드로후서 2장 4절의
내용을 에덴동산이라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의 결과이며,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계명을 어기는 것을 죄로 생각하는 자들은 영적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인 것이다. 죄는 세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서 5장 12절『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은 첫사람 아담이다.『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되었는데,『한 사람을 통하여』라는 말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통로인 것이다. 즉 통로라는 말은 죄가 통과하는 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죄의 몸이 죄의 통로이다. 로마서 6장 6절에 나오는 『죄의 몸』은 헬라어로『토 소마 테스 하마르티아스』(τὸ σῶμα τῆς ἁμαρτίας)라고 하는데, 죄덩어리의 몸이 아니라, 쓰레기를 담는 통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죄를 물건으로 생각한다면, 죄를 담는 그릇 같은 것이다. 첫사람 아담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다.
창세기 3장 6절에서『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는 탐욕을 가졌으므로 죄가 그녀에게 발생했고, 열매를 먹었으므로, 사망이 되었다. 그녀가 자기 손을 통하여 아담에게 준 것은 사망이라는 열매를 준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대속의 죽음을 갖게 되었음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남자와 여자)은 에덴동산으로 부터 쫒겨났다. 그래서 죄는 첫사람 아담(죄의 몸)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로부터 세상에 들어온 죄는 종결되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첫사람 아담이 되게했다. 하나님이 영을 흙에 들어가게 해서 혼이 되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혼:soul)이 된지라』혼은
죽어야 할 죄의 몸(죄의 통로)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 21절에서 하나님이 첫사람 아담을 잠들게 했다(죽음을 의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하나님이
사람의 갈비뼈를 끄집어 내어, 여자를 만들고 첫사람 아담의 갈비뼈 자리에 살(육적 몸:혼)을 채웠다.
그 후 남자(이름
아담)와 여자(하와)가
세상에 나타났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첫사람 아담)로 부터 분리된 자이다. 남자의 이름이 아담이므로 첫사람(아담)과 혼동된다. 첫사람은
이름이 없고 하나님이 사람(아담)아 라고 불렀다. 예수님도 자신을 인자(사람)라고
불렀다. 인자라는 사람은 세상에 온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남자와 여자는 첫사람 아담으로 부터 죄의 몸을 이어받아 태어났고,
범죄한 천사가 지은 죄가 하늘로 부터 그들의 죄의 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범죄한
천사의 영이 죄의 몸속으로 들어오므로 사람(남자와 여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악한 천사의 영은 죄의 몸에 들어오므로 영적으로 죽어버린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이 죄와 죄의 몸(육적 몸)이 있다. 죄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고, 죄는 하늘 나라에서 범죄한 영과 함께 들어오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은 죽으므로, 그리스도는 하늘로 돌아갔다. 첫사람 아담이 죽으므로 남자와 여자로 분리 되었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이 죽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와 다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악한 천사를 흙에 넣기 위해 먼저 세상에 흙으로 태어나
죄의 통로인 죄의 몸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첫사람 아담은 죄의 통로인 죄의 몸은 있지만, 죄는 없었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그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으므로, 첫사람 아담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므로 죄가 없다는
의미다. 예수님도 죄는 없고 죄의 몸만 있다. 그는 마리아로
부터 죄의 몸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의 몸을 없애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죄의 몸(죄의 통로)이 없는 것이다. 죄의 몸이 없는 자는 죄를 담을 수 없게 된다.
죄의 몸에 담긴 죄는 그 결과가 사망이며,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여러가지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한다. 육적본성, 혈연, 지식과 경험, 사상과
철학, 종교심, 자기의 의,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으로 나타난다. 이 일곱가지의 육적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사망인 것이다. 사망은
영의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죽었던 영을 살리기 위함이고, 죄와 죄의 몸에 대한 죽음이다. 죄에 대한 죽음은 물세례로 죄의
몸에 대한 죽음은 불세례로 표현된다. 죽고 죽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무트) 죽으리라(무트) 하시니라』『반드시 죽으리라』의 히브리어는 무트(죽고) 무트(죽으리라)이다. 세례는 두번 죽는 것이다.
2. 세상 밖에서의 죄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가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유다서(1:6)나 베드로후서(2:4)에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첫사람 아담이 누구인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그”(he)라고 표현된 분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런데,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먼저 나신 이” (πρωτότοκος πάσης κτίσεως) 영어로는 the firstborn of
every creature(kjv), the firstborn over all creation.(niv) 세상에서 처음 창조된 자는 첫사람 아담이다. 첫사람
아담이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로마서 5장 15절에서『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첫사람 아담의 범죄는 대속의 범죄라고 말을 할 수 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도 죄가 없는 분인데, 대속을 위해 죽으시므로 세상에 대해서는 죄인으로 죽으신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다시 로마서 5장 12절로 가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와 같이” 라는 말은 첫사람 아담이 한 것 같이 라는 말이다. 즉
그들의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말이다. 그들의 죄도 역시 첫사람 아담과
같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첫사람 아담은 대속의 죄를 가지고 세상에 들어오므로, 흙과
영이 결합된 혼으로 된 육체의 사람이 되었으며, 이후 그는 죽어야 할 죄의 몸을 후대에게 계속 물려주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아담이 죄에 대해서 죽는 일을 감당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9절에서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하와가 주는 열매를 받아 먹은 것이다.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이라고 볼 수 있는
천사들이 불순종하여 흑암에 가두어야 하는데, 물질세계가 필요하고, 흙으로
된 사람 모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두기는 하지만, 다시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대속의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삼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정해놓은 규칙을 스스로 불순종하여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하와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를 상징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이라는 그림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을
잠들게 하고(죽음의 예표), 갈빗대로 여자(하와)를 만들었으며, 갈빗대가
떨어져 나간 잠들었던 자가 깨어나 남자(아담)가 된 것이다. 사람이라는 히브리서 단어와 남자라는 단어는 공히 아담이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착각하기 쉬우나, 첫사람 아담과 남자가 된 아담은 다른 존재이다. 첫사람 아담은 그리스도이고, 분리된 후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천사의
영이 흙 속으로 들어온 자들인 것이다. 바울은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의 관계를 통해서
죄와 사망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3. 세상 안에서의 죄
세상에서 짓는 죄를 의미한다. 율법에서 정해진 것이든, 마음의 죄이든지 다 포함된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이유는 육체 속에
죄(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가 있기 때문이다. 영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각 사람의 육체에 들어왔으며, 육체
속에 죄(탐욕)도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있는 영은 죽었으며, 탐욕이라는 죄는 끝없이 세상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령훼방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로마서 5장 9절에서『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디카이오덴테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소데소메다)』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은 자가 되었다고 믿으면, 그의 속량의 피값으로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디카이오덴테스(δικαιωθέντες)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이라는 의미다. 소데소메다(σωθησόμεθα)는 직설법 미래 수동태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이 동시에 일어남을 보여준다. 하나님에 의해서 순간 이렇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의롭게 되는 것을 과거시제로, 구원받는 것을
미래시제로 번역했는데, 잘못된 번역이다. 분사구문은 동시에
일어나는 두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문법이다. 구원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영접기도하면 구원받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의 주체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접기도는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께 주인으로 모시는 기도인 것이다.
4.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요한복음 16장 7-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했지만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여 거처(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마련하고 데릴러 온다고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일로 인해서 세상에 사람들이 갇혀 살게 되고 그리스도를 예정했고 등등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면 성령으로 깨닫게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의 근본을 말했지만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아서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가진 것을 믿지 않으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성령훼방죄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인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성령훼방죄를 추가한다는
말은 어색하다. 죄인은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성령훼방죄라는 말도 필요없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전에 일어난 죄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제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가르쳐 주겠다고 하므로 성령을
통해서 가르쳐줌에도 예수의 말을 믿지만 온전히지 않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를 성령훼방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때까지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었고 성령이 오지 않으므로 성령모독죄는 아닌 것이다.
당연히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죄에 대해서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가 사람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인이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현재 또는 앞으로 지을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모독죄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현재와 미래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신도들에게 적용된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다.
Ⅱ. 율법과 율법주의 자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로마서 3장 19절『우리가 알거니와(오이다멘) 무릇
율법이(호 노모스) 말하는(레게스)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토이스 엔 토 노모)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오이다멘(οἴδαμεν)은 머리로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율법의 정체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호 노모스(ὁ νόμος)는 그 율법이다. 토이스 엔 토 노모(τοῖς ἐν τῷ νόμῳ)는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이다. 즉 율법의 범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효력이 발생한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 안에 속해 있는 자들이다. 기독교 역시 율법의 범주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으로 잘못을 가리는 모든 입들을 막으신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을 범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용도이므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다.
로마서 7장 7절『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메
케이토)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에그논)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에퓌디메오)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십계명의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죄의 욕망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7장 8절『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아포르멘
데 라부사 에 히마르티아 디아 테스 엔톨레스)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여기서 (아포르멘 데 라부사 에 히마르티아 디아 테스 엔톨레스ἀφορμὴν δὲ λαβοῦσα ἡ ἁμαρτία διὰ τῆς ἐντολῆς)는 『그런데, 그 죄가 그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얻은 후에』 라는 의미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주의 교육을 받은 후에 자기 안에 많은 욕망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기 안에 그런 욕망을 넣어준 것이 바로 죄라고 말한다.
죄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서 기회를 얻어 자기 안에 그런 갈망이 생겨나게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율법주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십일조, 주일성수, 교회 봉사, 새벽기도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이 율법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욕망이 생긴 것이다.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죽은 죄를 살아나게
한다. 하나라도 못지키면 스스로 죄가 되는 것이다. 온 열정을
다해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멀어지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없애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몰랐을
때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말한다. 계명을 지키려고 했을 때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므로
죽었다고 표현했다. 바울은 이런 진실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생명 속으로 들어갈 계명이 오히려 바울을 죽음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2. 율법 속의 그리스도
로마서 3장 21절『이제는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코리스 노무(χωρὶς νόμου)는 율법과 별도로 라는 의미다. 코리스는 영어로 without이다. 별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복음이다. 율법이 변하여 복음이 된 것이 아니라, 율법 따로, 복음 따로 인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은 율법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속에 생명나무가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죄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 희생제사를 통해서 죄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신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믿고, 그리고 그 분이 하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를 받은 것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죄 사하심의 속량을 얻는다. 로마서 3장 24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디아 테스 아폴뤼트로세오스 테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속량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산다는 말이다. 사탄의 노예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피값으로
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세상 사람들을 죄로 부터 완전히 풀려나게 된 것이다.
3.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루려는 율법주의자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는 복음과 율법을 구분하여 말한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리는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주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바른 말일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계명을 지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했으나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너희들은
모두 죄인들인데, 율법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희생제사를
통해서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발견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곧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누가복음 24장 27절에서 길을 가다가 두 사람의
제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자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갈리리 바닷가에서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나 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결국 구약시대 율법 속에서 알려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여기에서도 성경은 바로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이 말하고 있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씀이다. 이사야서 34장 16절에서『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여호와의 책은 율법을 의미한다. 모든
율법을 다 읽어보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율법
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죄인들은 동물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뿌렸다. 제사장은 죄인으로부터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고, 죄인을 대신해서 동물이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동물이 다름 아닌 죄인이라는 것이다. 비록 대신 동물이
죽지만, 죄인과 동물이 연합되어, 죄인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사를 통해서 다시 태어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새 창조에 속한다. 히브리서 9장 11절에서 이 세상의 창조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요한복음 3장 1-9절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0절에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비난의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선생(랍비)들은 제사에 관한 규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를 통해서 죄인을
대신해서 동물이 희생당하고, 그 결과로 인해서 죄인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진리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듯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율법은 엄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율법) 속에
생명나무(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죄는
그 열매를 먹는 것 이전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나무를 통해서 그
탐욕의 마음이 있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죄가 아니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주의는 그리스도를 제거한 인본주의 사상인 것이다.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 안에서 만연한
율법주의(인본주의) 사상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게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 속에서 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계명에 얽매여 그것을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규정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또한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침을 내리는 듯한 말도 다
율법주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목사들은 자기를 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인간들은 죄인들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로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치는 사도바울의 말을 기억하지 않으면, 율법주의(인본주의)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는 자들의 모습은 행동을 강조한다. 야고보가 말하는 규정을 들어서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행함으로 나타나지만, 행함을 의무적인 규정처럼 생각하게 한다면, 율법주의 생각인 것이다. 행동을 강조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를 섞는 기독교는 이미
참된 진리의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모든 종교가 통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는 교회 안에서 영적 분별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영적 분별이 있으면, 열처녀의 비유처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가 섞여 있음을 알게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며, 양과 염소의 비유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주의(인본주의)와 섞으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제2부. 믿음과 구원
Ⅰ. 믿음
1. 율법 아래에 있는 믿음
갈라디아서 3장 23절『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여기서,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법이 필요없는 것이다. 법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없다는게 문제다. 그래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고, 성령이
부활생명으로 성도를 인도하신다.
갈라디아서 3장 24-25절『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성도가 율법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이제 더 이상 율법은 필요가 없게 된다. 이때 율법은 규정에 얽매인
율법주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은 초등교사와 같이 읽는
자로 하여금 그 속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계속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읽는 자가 아 그렇구나 율법은
결국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군 하고 깨달으면 더 이상 율법주의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발을 들여다 놓으면
대체로 율법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자신이 맞는 예수를 믿는 것이다. 복을 주는 예수, 천국을 인도하는 예수, 세상에서도 축복을 주는 예수 등으로 스스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 아래 있음을 깨닫고, 율법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을 깨닫는 자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죽고 다시 부활함을 의미한다. 세례는
물에서 죽고(물세례), 불에서 타 죽은(불세례) 자임을 믿는 것이다. 이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다. 부활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다. 부활은
전에 있던 것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기 전에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전의 몸은 육체가 아니라, 영의 몸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이 일어나는 것이며,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자도, 이전의 천사의 영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누가복음 20장 36절『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2.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
갈라디아서 3장 25절에서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믿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다. 에베소서 1장 3절서『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이런 복이 온다는 것이다. 복은 영생의 부활생명이다. 성도가 이런 복을 받을 것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복)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이셨다. 성도가 그 다음
열매맺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믿음
내가 구원과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된다.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예정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을 때 성부가 다시 하늘의 생명으로 부활시켜주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 속으로 성도가 들어가서 연합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새로 지으심』과 고린도후서의『새로운 피조물』은 같은 말씀이다. 영생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게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자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거듭난 자도 부활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부활이 된다. 거듭남은 새 피조물이요, 새 창조가 된다. 거듭난 자가 새하늘과 새땅에 거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서『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육체를 따라 난 자가 이스마엘이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이삭이다. 2000천년 교회 역사가 그러했다. 교회 안에는
두가지의 생명이 존재한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자들을 핍박한다. 현재적 부활을 전할 때,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신도가 참성도를 핍박한다.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자는 율법 아래 있는 자이고, 거듭난 자가 아닌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23-25절에서『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곳이고, 예루살렘은
율법을 보관하고 지키는 곳이다. 이렇게 율법을 받고, 지키는
것이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가나안을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자들이다. 신약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다. 교회 안에 육체를 따라 난 자의 말을 듣고 따라가는 자들은
멸망당할 것이다. 오직 영을 따라 난 자가 구원이 된다. 영을
따라 난 자가 성령 안에서 부활생명으로 태어난 자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거듭났다고 믿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얻지 못하면 다 『자기의 의』에 빠져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활생명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는 로마서 6장 7절에서
처럼『죽은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가 된다. 죽은 자는 십자가에서 연합되어 죽은 자이다.
Ⅱ. 구원
1. 구원의 의미
구원은 죄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의미를 여러 각도로 설명했다.
먼저 하나님의 의를 받는 것을 구원으로 연결시킨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인데, 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 자는
죄인이고 심판받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 구원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 로마서
10장 2-3절에서『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에피그노신)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복음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선민사상에 붙잡혀
이러한 근본적인 목적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 속으로 들어가도록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법적인 관계의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는바, 율법과 성령의 법을 들어서 설명한다. 법적인 관계로부터 설명을 한다면. 율법 아래 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될 때,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 안으로 들어가며, 이를 구원이라고 말을 한다. 구원에
대한 법적인 논리의 설명이다. 죄인은 법적으로 사탄의 소속이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피값을 지불하여, 소속이 그리스도에게로 전환되었다는 말이다. 로마서 8장 1-2절『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영적인 의미에서는, 죽었던
영이 다시 부활생명으로 살아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감을 부부관계 또는 부모관계를 통하서 설명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는 것, 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
등이다.
영적인
의미는 원 하나님 나라 천사였는데, 하나님께 죄를 지어 흙속에 갇히므로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설명을 부모와 자식, 또는 부부관계로 설명한다. 에베소서
5장 30-31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자(세상에 온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아내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갇힌 영들을 의미한다. 영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영적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부를 만드신 이유는 너희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인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이 교회 공동체의 근본이 된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여자는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자였던 신도들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속관계를 통해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상속자이며, 아들이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설명한다. 아들과 아이들은 같은 자녀이지만, 아이들은 기업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클레로노모스)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슁클레로노모이 크리스투)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쉼파스코멘)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클레로노모이(κληρονόμοι)는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이다. 슁크레로노모이
클리스투(συγκληρονόμοι Χριστοῦ)는 그리스도와 함께 함을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상태를 구원으로 연결한다. 마음에 대해서는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마음의 확신 또는 신념을
의미한다. 로마서 10장 9절『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호모로게세스)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피스튜에세스) 구원을 받으리라(소데세)』
호모로게세스(ὁμολογήσῃς)와 피스튜에세스(πιστεύσῃς)는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일을 표현한다. 하나님에
의해 순간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시인하고 믿는가 하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그렇게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되게 하시는 것이다. 소데세(σωθήσῃ)는 미래시제, 수동태이다.
10장 10-11절『사람이
마음으로 믿어(피스튜에타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호모로게이타이)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피스튜에타이(πιστεύεται)와 호모로게이타이(ὁμολογεῖται)는 수동태인데, 한글 개역개정에는 능동태로 번역했다. 믿어지면서, 시인하여지면서 이다.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2. 구원의 대상
에베소서 1장 4-5절 『곧 창세 전(프로 카타볼레스)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프로오리사스)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한다는 말은 물질에 앞서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신다. 프로 카타볼레스(πρὸ
καταβολῆς)는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말이 카타볼레스 앞에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예정(그리스도 안)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다. 대부분 많은 교회 사람들이 창세 전부터 어떤 특정한
성도를 택했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택한다는 의미다.
그 기쁘신 뜻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기쁨』 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이다. 프로오리사스(προορίσας)는 먼저 표시를 한다는 의미다. 그 표시는 양자라는 표시다.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된 예정은 그리스도의
예정과는 차이가 있다. 양자라는 표시는 그리스도의 예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를 나타낸다. 창세전에 미리 양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가
되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예정
에베소서 1장 4-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인해서 안식이 깨어지고, 하나님이 직접 그리스도가 되셔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원래대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예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모습이 된다.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에서는 예정론에서 두가지의 예정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셔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금령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하나님께 죄(원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이렇게 될 줄을 아시고,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서 죄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논리다.
둘째, 하나님이 창세전에 성도들을
구원하기로 미리 선택했다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며,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을 강조한다. 예정은 은혜로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하였고 반면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예정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면,
범죄한 천사들을 가두기 위하여, 하나님의 빛을 차단하고 물질세계를 만드는 일, 세상에 던져진 영들을 어떻게 회개하게 하여 구원할 것인가, 셋째하늘을
다시 회복하게 하는 일이다.
(범죄한 천사들을 가두기 위한
물질세계의 창조)
창세기 1장 1절『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빛을 차단하여 물질세계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이다. 물론 일정기간 하나님의 빛이 차단되므로 흑암의 곳이
되기는 했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다시 빛을 비춰주셔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 셋째하늘을 에덴동산이라고 하며, 회복된 후에는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물질세계(세상)를 분리해 내었다 라는 말씀이다. 한 나라에서 감옥이라는 곳을 설치해서 분리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로 부터 분리되므로 흑암과 공허함이 있다.
첫사람 아담(그리스도)은
에덴동산에서 주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을 가진 자다. 또한 범죄한 천사들에게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세상에서
창조된 자임을 표현한다. 세상에서 창조된 첫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옮겨간 것은 에덴동산의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첫사람 아담이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창세기 2장 21-22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첫사람 아담이 잠들었다는 말은 육체로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자리로 돌아감을 상징한다. 그리고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 새창조를 예고하고 있다. 아담의 갈빗대를 수단으로 한다. 죄인된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첫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분리되어 남자인 아담과 여자인 하와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은 범죄한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세상으로 내 보낸 사람은 첫사람 아담(사람)이 아니라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인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아다마(사람)으로 번역되지만, 남자 아담은 남성(이쉬 male)인 것이다. 영어로 둘다
man으로 표현하다 보니 혼란을 준다.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 옛뱀(사탄), 아담, 하와가 등장한다. 하나님이 다시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를 세상에
내 보낸 것은 천사들을 첫사람 아담으로 부터 분리된 육체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육일
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창세기 2장 1절에서『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재편되었다』 라는 의미다. 땅의 군대는 셋째하늘의 악한 천사들을 육체를 입게 했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 물질세계로 바뀐 후에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는 육체를 생산하기 시작하고 대를 이어서 인구는 늘어났다. 말하자면 흑암으로 바뀐 어두운 영을 하나님이 육체 속에 가두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28-29절에서『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프로 카이로 προ καιρου)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카이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이다. 물질세계의 때는 크로노스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심판의 때도
생각할 수 있지만, 어두운 영들은 육체 속에 갇혀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어두운 영들이 육체 속에 들어갔다가 인간이 되어서 죽고 음부에 들어가면 이 물질세계는 끝이 나고 하나님이 심판을 하여 셋째하늘에 복귀하거나 아니면
둘째 사망에 처해지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자신의 빛을 막으시므로 흑암과도 같은 곳으로 바뀌었다. 세상으로 말하자면 감옥과 같은 곳이다. 천사들이 육체에 갇히므로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감옥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과 분리 된 것과 같은 것이다. 분리의 수단이 감옥은 철창이지만 인간은 육체이다. 그런데, 이 감옥과 같은 땅에서 어두운 영을 지배하는 자는 여전히 사탄이다. 하나님이 사탄을 사용하고 계신다. 에덴동산이 회복될 때까지 사탄을 그곳의 지배자로 허용하셨다. 누가복음 4장 6-7절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의 말이다.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다시, 인간이 셋째하늘(에덴동산)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육체가 죽고 영이 영의 몸(부활생명)을
입고 돌아가야 하는데 육체를 입은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현재 셋째하늘을 맛보고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임재하셔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즉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언젠가 육체를 벗으면, 셋째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4.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받아주신다. 이것을 속량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의 그물 안에 있는 자를 사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14절에서『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판단컨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한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15절에서『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하려 함이니라』그러므로 자기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는
예수와 함께 죽지 않은 자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믿는다. 이 부활은 육체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부활이다. 그래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은 후에 부활한다면 원래 자리로 덜아가야 맞는
말이다. 그래서 영으로 다시 일어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육체를 다시 살려서 무엇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부활도 영적으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비록 육체가 있지만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5. 이스라엘과 이방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심령 안에 영적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두 부류에 대해서 설명하면,
로마서 11장 25-27절에서『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이『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지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누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누가는『이방인의 때』라고 했다.
『이방인이 다 구원 받을
역사가 일어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사도바울이『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 이방인의 수와 누가가
말한『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에서 이방인의 때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씨의 약속을 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씨의 약속은 천하만민을 위한 씨의 약속이다.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도
이방에 대한 씨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그리고 이사야서 49장 6절에도 이스라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방에 대한 구원이요, 구원의
빛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찾도록 했지만 실패하고, 이제는 이방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마태복음 20장 15-16절『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이방인에 대한 구원은 마태복음에서 어느 왕의 혼인잔치 비유라든가,
로마의 백부장 부하를 치유한 사례,『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라는 표현들을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이 먼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신도의 심령 속에 나타나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비유이다. 이는 옛사람(이방인)과
새사람(영적 이스라엘)이다.
사람이 태어나면태부터 옛사람의 성전이 마음에 심어져 있다. 옛성전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의 신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시고, 회개하여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하셨다. 새성전이다. 예수님은 옛성전은 무너져야
함을 강조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된다. 그러면
하늘서 새로운 부활생명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심령 속에 부헐생명이 새성전이 세워짐으로 그리스도께서
심령 속으로 들어가시고, 새사람(영적 이스라엘)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과거에 유대인이 예수를 핍박해서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오늘날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인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제3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Ⅰ. 죽음의 의미
1. 죽는다는 것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에밮디스멘
에이스 크리스톤 예순) 우리는 그의 죽으심(톤 다나톤)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에 아그노에이테)』
톤 다나톤(τὸν θάνατον)은 죽음이다. 에밮디스멘 에이스 크리스톤
예순(ἐβαπτίσθημεν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받은 것이다. 에 아그노에이테(ἢ ἀγνοεῖτε)는 책망하는 질문이다. 예수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데, 왜 모르느냐 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례받은 것은 죽고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물세례와 불세례이고, 부활을 상징하는 것은 성령세례이다.
6장 4절『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디아 투 밮티스마토스)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쉬네타페멘)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헤메시스 엔 카이노데티 조에스 페리파테소멘)』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어 믿는 성도 역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과 같이 성도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부활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눈으로 보이는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의 몸과 혼(옷)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죄의 몸(fresh)은 엣사람으로 표현되었다. 이 옛사람은 첫사람 아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육적
몸을 의미한다. 이 육적 몸은 육체(body)와는 다른 것이다. 육체는 살덩어리이지만, 육적 몸은 영이 입는 옷(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6장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투토 기노스콘테스τοῦτο γινώσκοντες)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호티 호 팔라이오스 헤몬 안드로포스 쉬네스타로우데)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히나 카타르게데 토 소마 테스 하마르티아)』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라고 했다. 죄의
몸이 못박히므로, 죄에 대해서도 죽고(물세례), 육적 몸도 죽은(불세례) 것이다.
로마서 6장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아페다노멘 테 하마르티아)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제소멘 엔 아우테)』 테 하마르티아(τῇ ἁμαρτίᾳ)는 율법을 범한 죄가 아니라 육신의 약함으로 인해 짓는 죄를 의미한다. 죽었다 라는 아페다노멘(ἀπεθάνομεν)의 의미는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아포다노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렇듯이 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는 것이다.
육적 몸이 죽은 불세례는 마태복음 3장
11-12절에서『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불로 태워지는 것은 옷과 같은 부모로 부터 받은 혼이다.
어린양이 대속으로 죽을 때, 피를 제단에 뿌리고(물세례), 그 살과 껍질은 불에 태운다(불세례) 이는 살과 껍질에 해당되는 것이 옷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쫒아낸 아담과 하와를 위해 입히신 가죽옷에
해당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20-21절『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히브리어로 가죽(오르)의 옷(코트노트)이다. 개역개정에서 가죽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영어성경의 skin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된 것 같다. 그러나 skin은 살도 된다. 즉
가죽이라는 오르는 레위기 1장 6절의 살 덩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옷은 번제물의 가죽에 해당된다.
물세례와 불세례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세례를 받는다. 성령세례는 부활의 옷이다.. 부활은 이전의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육으로 보면 이전의 것은 육체이지만, 영으로 보면 이전의 것은 흙속에
갇힌 영이다. 흙속에 갇힌 영이 죽어있었지만, 살아있는 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난 영이 옷을 입는데,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4-45절『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프쉬키콘)으로 심고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소마 프쉬키콘)이 있은즉 또 영의 몸(소마 프뉴마티콘)도 있느니라』
썩을
몸은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의 육의 몸(혼의 몸:옛사람)을 의미한다. 부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영의 몸이
썩지 않는 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몸은 모두 혼의 몸이다. 소마
프뉴마티콘은 신령한 몸이 아니라, 영의 몸이다. 프쉬키콘은
육의 몸으로 번역되었는데, 혼의 몸이다. 영의 몸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몸인 것이다.
혼의
몸은 부모로 부터 받은 혼적인 몸이다. 이 몸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하늘로 부터 새로운 몸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혼의 몸으로서, 영적인 몸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구원은 혼의 구원이라고 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혼이 살아난 영과 결합되는 것이 이전으로 돌아가는 구원이 된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서
믿음의 결국 곧 영혼(푸쉬케)의 구원을 받음이라. 푸쉬케는 영혼이 아니라 혼이다.
2. 첫째 죽음
창세기 2장 7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생기는 영에 해당된다. 영이 흙에 들어가면, 영은 죽고, 흙은 혼이 되어 살아나고, 영이 나가면 흙인 육은 죽는다. 따라서 영이 흙에 갇힌 것이 첫째
죽음이다. 성경은 영에 대해서 죽음을 말을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8장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살리는 내용이 나온다. 8장 55절에서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그 영이 돌아오는 것은 같은 것이다. 헬라어로
푸뉴마(영)가 돌아왔다. 영이
돌아와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영이 흙에 들어가면 살아있는 생명체(혼)가 된다.
우리말 성경에서 영혼, 영, 혼이라고 혼란스럽게 번역되어 있다. 우리말 번역이 한자를 주로 사용하다
보니 이렇게 번역이 된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정확하게 헬라어로 정의하자면 영과 흙이 만나면『살아있는
생명체(혼)』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죽으면 영과 육이 분리되어 각자의 길로 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혼)는 영과 흙의 결합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영은 육으로부터 빠져 나가고, 혼이라는 육적 생명은 사라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이 말을 통해서 영이 죽어있음을 알게 해 준다. 전도서 12장 7절에서『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흙은 사람의 육체가 흙으로 지어졌으므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 둘째 죽음
육체가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몸(엣혼)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6장 4절『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장사된(죽음) 것이
혼에 대한 장사되었다는 말이다.
둘째 사망이라는 용어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20장 13-15절『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사망과 음부도 불못(헤 림네 투 퓌로스)에 던져지니"
사망과 음부는 인간 내면의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로 되어 있는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 속에 생명책이 있다.
생명책이 없는 자는 율법으로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받는다. 불과 성령으로 심판받는 것이 세례인
것이다. 세례는 죽음(사망)을
의미한다. 옛사람의 죽음이다. 옛사람은 심판받는다.
사망은 영적으로 죽은 자(옛사람), 음부는 둘째 사망에 처해지는 자가 가게되는 곳을 의미한다. 헤
림네(못) 투 퓌로스(불)는 못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불은 성령의 불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불로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옛사람인가 아니면 생명책이 있는 새사람인가? 그의 생각과 믿음대로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신도의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Ⅱ.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1. 죄는 반드시 처벌한다
로마서 3장 19절『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가르치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랑의 주님을
믿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주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음성도 듣는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자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옛생명이라고 한다. 옛생명은 변화가 불가능하다. 옛생명은 죽어야 한다. 다른 종교에서 옛생명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본다.
성경에는 의와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사랑을 먼저 강조한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서 말하는『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육의 몸이 죽고 부활영생의 몸으로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많은 교회에서 전도할 때도『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한다. 미혹이다. 그러나『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노하십니다』라고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노아의 홍수와 같이 죽어야 할 자이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불에 타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세례(물세례와 부렛례)를
통해서 알게 해준다. 깨닫는 자는 물에서 구원(방주)되고, 불에서 구원(롯의
가족)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죄는 근원적으로 사람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의 죄를 의미한다. 물론 율법 아래 지은
죄도 포함되지만, 심중의 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육적인 몸이 죄의 몸으로 되어, 세상에서
나타난 결과가 세상죄인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것은 죄의 몸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죽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고 회개하여 깨닫는 자를 위해, 그의 아들의 대속의 죽음(죄를 용서받고)과 죄인이 연합하여 죽음(혼의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죽은 자가죄에서 벗어난다고 말을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고
처벌인 것이다.
2. 속량
대속이라는 의미를 갖는 속량은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개념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 지배권을 주었다. 누가복음 4장 6절에서『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하나님이 사탄으로부터 자기 아들의 피값으로
사는 것이 속량이다. 속량이 없는 죄사함은 없다. 노예를
산 다음에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이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속량이 되어야 깨끗하게 된다. 하나님이 회개하여 옛사람의
옷을 벗는 자를 속량하셔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19-20절『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골로새서 1장 13-14절『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구원의 문제는 더러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으로 부터 건져내는 것이다. 흑암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 1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속량으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죽음에
연합되는 자를 사시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사해주신다. 사는
것이 속량이다.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서는『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하나님을『주』라고 말하는
이유도 하나님이 사셨기 때문이다. 구원을 죄사함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자가 이단이 된다. 속량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교회가 참 교회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이단이다. 회개의 의미를 모르므로 죄사함만 있는 것이다.
3. 어린양의 죽음
로마서 8장 22-23절『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속량은 다른 말로 구속을 의미한다.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삶의 허무함과 세상의 부패함으로 고통을 당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가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에 의하여 실현된 것을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세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말씀을 회상시키고 있다.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성만찬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대속(속량)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성만찬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비유된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취하여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다. 죽음의 사자가 그들을 지나갔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죽지 않았지만, 어린양의 고기를 구워막으므로, 죽은 어린양과 연합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죽음을 통하여, 드디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너(물세례), 광야를
지나(불세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신 새언약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성도의 심령 속의 천국을 의미한다. 성찬식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고 기념하지
않으면, 의미없는 의식에 불과 한 것이다. 예수님은 성찬을
통해서 하나되는 것을 강조했다. 먹고 마시는 것이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이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은 그 어린양의 고기와 는 자와 하나가 되는 의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7-22절에서 성찬을 통한 성도의 하나님 됨을 강조한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사도 바울은 성도 간의 성찬의 중요한 의미와 이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에는 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이러한 관습에 따라 교회 안에서 애찬을 통하여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모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다.
4.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고린도전서
5장 6-8절『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당시
고린도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단순히 신도들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마치 누룩이 번지는 것처럼 신도들 사이에 퍼져갔다. 바울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수정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몸도 죽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은 죄인이 죄를 씻는 것과 동시에 죽은 양의 고기와 껍질을 태우는데, 이는 죄의 몸도 죽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약으로 말을 하자면
옛사람의 죽음이며, 첫사람 아담에 대한 죽음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죄의 몸인 옛사람의 죽음이기도 하 다. 성경은 죄에 대한 죽음을 물세례로 표현하고, 죄의 몸이 죽는 것에
대해서 불세례로 표현한다.
5. 예수와 연합되어 죽은
자
구약시대,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어린양을 성소마당에 끌고 와서, 양의 머리에 죄를 전가시키기 위해 안수를 한다. 그리고 죄인이 그 양을 죽여서 피를 받아서 제사장에게 건네주면 제사장은 제단에 피를 뿌리고(죄사람:물세례), 어린양의
몸을 각을 떠서 살과 가죽을 태우는 것이다.(불세례)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과
죽은 어린양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죽은 어린양은 대속으로 죽었지만, 의미상으로는
죄인이 죽은 것이다. 죄인이 피를 흘리고 살이 불에 태워져 죽은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천년 전에 죽은 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나와 무산 상관이 있는가? 신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됨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탐심)뿐 아니라 죄의 몸에 대해서도 죽는 것이다.
Ⅲ. 죽음을 의미하는 세례의 의미
1. 물세례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베드로전서 3장 21절)
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 물을 적시나, 원래 침례는 물에
잠기는 의식을 한다. 물에서 죽었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물
밖으로 올라오면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회개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탐욕에 대해서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 죄의 근원이다. 죄의 근원에 대해서 돌이키지 않은 자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근원은 탐욕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그 탐욕이 우상숭배이고, 마음
안에 감추어진 욕망이다. 탐욕이 죽어야만 한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을 했다.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 물세례이다.
2. 불세례
불세례는 죄의 몸(혼)에 대한 죽음이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의 몸(혼)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모트) 죽으리라(타무트)
하시니라』 모트 타무트는 죽고 죽으리라 라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가 아니라,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으로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으로 먹으면 죽고 죽는 것이다. 앞의 죽음은
첫째 사망을, 뒤의 사망은 둘째 사망과 연결된다.
『죽는다』라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이 죽어있는 상태다. 그리고『또 죽는다』라는 것이다. 영이
이 세상에 갇히므로 한번 죽었는데, 다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첫째 사망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첫째 사망인 것이다. 그래서 육체는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을
전제로 말하시는 것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히브리어 성경에는 『죽고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다. 번역과정에서 두번 죽는 것이 있으므로
강조한 것으로 생각해서『반드시』로 번역된 것 같다. 두번 죽는 것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서『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둘째 사망은 영의 몸을 입지 못한 자들이 받는 것이다. 영의 몸(하늘로부터 오는 혼)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영의 몸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적 몸(혼)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여기서『먹는 날』의 날은 욤(날)으로 표현되었다. 이 욤은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힘써 노력한 인생의 날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22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자 중에서 가족이 죽었는데, 장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영이 죽은 자라는 것이다. (영이) 죽은 자가 (육체가)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는 영이 죽은
상태이며, 육도 죽은 것(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을 포함)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죽을 육체를 어떤 기간을 정해서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했으니 그 기간 동안 노력해보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제4부. 부활
Ⅰ. 그리스도의 부활
1. 첫열매
고린도전서
15장 20절『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네크론)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에게게르타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아파르케ἀπαρχὴ)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15장 21-22절『사망이
한 사람(첫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조오포이에데손타이)』첫사람 아담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자를 상징한다. 마지막 사람
아담(그리스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를 의미한다.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은 아담으로 부터 죽음(육)을 물려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부터
생명(영의 몸)을 물려받은 것이다. 조오포이에데손타이는 살리심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다. 조오포(생명)이에데손타이(만들다)에서 조오포의 어근인 조에는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씨껍질이 죽어야 씨눈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듯이, 육의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농부가
씨를 뿌리지만, 장래의 형체를 뿌린다는 것이다. 나중에 씨가
열매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씨를 뿌린다는 것이다. 씨가 형체로 바뀌는 것이다. 땅에 있는 형체나 하늘에 있는 형체가 어느 시점에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2.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영의 몸으로 표현했다. 바울은 씨에 대해서 말하면서 몸과 비교하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과 비교하고, 다시 몸을 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이 다양하게 설명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썩을
몸은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의 육의 몸(혼의 몸:옛사람)을 의미한다. 부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영의 몸이
썩지 않는 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몸은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혼의 몸이다. 영의 몸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몸인 것이다. 부모로 부터 받은 혼적인 몸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하늘로 부터
새로운 몸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혼의 몸으로서, 영적인
몸이라고 표현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프쉬겐 조산)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프쉬겐 조산(ψυχὴν ζῶσαν)은 살아있는 혼이다. 첫사람
아담은 육체에 영이 갇히므로 영은 죽고, 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모로
부터 받는 혼(옛사람)은 죄의 몸으로서 그 속에 죄가 담겨져 있다.. 따라서 하늘로 부터 새로운 혼(새사람)을 받아서 입어야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체(영의 몸)은 신비스러운 몸이었다. 제자들에게 벽을 뚫고 들어가시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런 신비한 몸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죽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전의 몸은 사라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몸이므로 이전의 몸과는 다른 존재이다. 심지어, 교회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는 들림받아서 죽지 않는 경우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부활을 오해해서 생긴 일이다. 부활은 이전의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몸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를
유다는 모세의 시체와 에녹을 비유로 해서 설명했다. 모세도시체가 사라졌는데, 마귀와 천사장 미가엘이 다투는 모습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라지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한다.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에녹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데려가심을 들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은데, 이는 부활의 예표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태어난 세례요한의
영인 엘리야도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림으로 생각하는데, 이도 부활의 예표인 것이다.
Ⅱ. 성도의 부활
1. 성령세례와 성도의 부활
하나님은 육적으로 두번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신다. 물세례(죄에 대한 죽음)와
불세례(혼에 대한 죽음)를 받은 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고
죽었던 영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영의 몸을 입혀주는 것이다. 이게
부활이다.
부활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이루어진다. 부활이 이루어진 사람을 성도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어야 성도인 것이다.
로마서 6장 4-5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성도가 되면 그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성전이 세워지면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돌 성전이 무너진 것 같이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의 성이
무너지고 새사람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전의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는 것이며, 소속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율법이 아니라, 하늘의 성령의 법에 적용을 받는 것이다.
참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며 함께 부활한 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지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담대하게 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날마다 죄를 용서받으려고 성소의 마당에서 왔다갔다
하는 자들인 것이다. 날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를 날마다 죽이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날마다
자기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날마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므로 그들은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이 말은 죄의 몸이 죽고,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묘사했다. 이전의 죄의 은은 죽고,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몸을
입고 영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육체를 받을 때,
나타난 혼(이전의 혼)은 죽은 혼이다. 그러나 거듭나 하늘로부터 받는 혼은 살아있는 혼이 되는 것이다. 부활은 영의 몸(새로운
혼)을 입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혼의 부활인 것이다. 그래서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2. 옛사람과 새사람
에베소서 4장 22-24절『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옛사람을 벗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성령으로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새사람은 새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로마서 6장 4-6절의
말씀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새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다. 새사람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새사람인 것이다. 새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사람은 새성전, 옛사람은 옛성전을 의미한다. 첫사람 아담은 옛사람으로서 사람의 심령 속에 세워진 옛성전이다. 이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우상숭배의 곳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라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 자기가 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첫사람 아담으로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나 새사람인 마지막 사람 아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 셋째 하늘
셋째하늘을 에덴동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천년왕국이라고 하기도 한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서『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년왕국은 메시야 왕국(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다. 즉 에덴의 동산과 같은 것이다. 천년왕국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다스린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새성전과 그 성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가 천년왕국이고, 에덴동산이며, 셋째 하늘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십사만 사천이 되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다른 이름이나 같은 의미다.
성도가 천국의 시민이 되면 그는 천년왕국에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 또는 천국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한다. 천국(천년왕국)은
성도가 육체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라고 말하는데,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자이며, 그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져, 그리스도가 그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올 때, 천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온 것을 믿지 않는 자이며, 그에게는 천국이 임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천년왕국이 되지 못하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현재부활을 이루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천년왕국을
예수님이 지상재림하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칠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고, 전천년, 후천년, 무천년설 등의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을 근거로 환란을 피할 수 있도록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성도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성도의 심령 안에 있는 생명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지고, 그리스도
안에 성도의 이름(십사만사천)이 새겨지는 것이다. 이게 천년왕국이라는 말이다. 천년왕국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 바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르 의미한다.
4.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19장 8-9절에서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석달 동안 강론했다고 한다.
바울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몇 가지 특징들을 지녔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엡 5:5)이며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의 나라로 동일시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왕적 주권을 집행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골 1:13) 되는데, 바울은 그것을 “속량 곧 죄 사함”을 얻는 것으로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결정적으로 실현하는 중심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이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시고, 성도의 심령 속에 재림하여 들어가실 때,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운행하는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바울서신에서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기도 한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 오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우주권 통치권을 넘겨받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그의 아들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되셨다. 그리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늘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통치권을 행사하실 때 그는 그것을 항상 성령을 통해서 행사하신다(행 2:33; 5:31-32).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의 집행능력이시다. 성도의 심 속에 임재하여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통치권을 성령을 통해서 행사하신다.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주의 영”(고후 3:17)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으로 불린다. 성령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실현시키는 능력이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재현하도록 만드는 능력이시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다. (고전 4:20; 15:24, 골
1:13; 롬 14:17, 갈 5:21; 엡 5:5)이다. 성도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은 그들이 현재적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현재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에 사는 사람들이고, 육체가 죽어서 부활을 믿으므로 또한 미래에 사는 자들이다.
넷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신성에 참여하는 성도의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에팡켈미타)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퓌세오스)에 참여하는(데이아스 코이노노이)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에팡켈미타(ἐπαγγέλματα) 는 약속인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주시려는 약속이다.
『데이아스(신) 코이노노이(참여하다) 퓌세오스(본성) 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 』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의 성품은 마치 인격적 의미를 나타내지만, 신성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성도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품은 변하는 모습이지만, 신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서 교회 목사들 중에는 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연결해서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신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데, 그들은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배드로후서 1장 5-7절『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스푸데)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스푸데(σπουδὴν)는 열망으로서, 신성에 참여하는 열망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여덟가지 덕목이 등장하는데, 마치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믿음 안에 덕이 있고, 덕 안에 지식이 있고, 지식 안에 절제가 있으며, 절제 안에 인내가 있고, 인내 안에 경건이 있고, 경건 안에 형제 우애가 있으며, 형제 우애 안에 사랑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더하라』는 말이 『노력하라:make every effort to add』는
말로 영어성경(niv)에는 번역되었다. 물론 킹제임스 번역은
『주어진다(giving)』로 되어있으며, 헬라어 원문에는παρεισενέγκαντες(파레이세넨칸테스:적용하다) ἐπιχορηγήσατε(에피코레게사테:주다)』(여덟가지 덕목이) 주어지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신성이 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덕(탁월함)이 생겨나고, 지식(하나님과의
하나되는 관계)을 통하여 은사를 받게되고, 그래서 사람이
교만해질 수 있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절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휘포모네)로 연결된다.
휘포모네는 주님의 보좌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유세베이안: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결국 성도에게 있어서 심령 속의 하나님 나가 이루어질 때 일어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성부와
아들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연결되고 하나가 되어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모습들이다.
Ⅲ. 성도에게 주어지는 은사
1. 방언과 예언
교회사람들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결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히브리어 외에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던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가바도기아인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들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서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을 말할 때, 반응이 두가지인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의 출신들인데, 어떻게
이런 외국의 말들을 하는가 라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라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이 제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큰 일을 들어보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술취했는가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횡설수설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말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이며,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당시에는 정말 술취한 자로 취급받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요엘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주었다.『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말한 것의 핵심은 여러 나라의 언어인 방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큰일(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회피해 버린다. 그래서 복음이 마치 외국어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게 방언인 것이다.
복음은 성도에게
개인적으로 복이 된다. 그리고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방언처럼
들리는 복음을 전할 때, 통역하는 자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할 때 어려운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성령이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어처럼 느껴지는 복음은 비록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지만, 성령에게
하는 말이며,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된다. 성령을
거부하는 자는 죄의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예언은 하나님의 큰 일에 관한 복음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도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대부분 교회 목사들이 교리를 바탕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깨달아 전하는 것이 참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큰 비밀을 알게 된다. 이게 바로 예언인 것이다.
예언은
개인의 길흉사를 점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제대로 전하는 것이 바로
예언인 것이다. 방언과 예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에게 하는 것이고, 예언은 믿는 자에게 하는
복음인 것이다. 대상이 다를 뿐 같은 이치에 있는 복임인 것이다. 오늘날
방언을 “라라라라” 라고 하는 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신도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참 진리를 깨달아야만 된다.
2. 사랑과 성도간의 교제
고린도전서 12장 13절『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라는 것이다. 여기도 삼위일체의 사상이 들어있다.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성도간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나무와 가지로 비유한다. 그리고 몸에서 머리와 각부분의 지체로 비유한다. 하나의 일체이지만, 각각 역할이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27-28절『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교회는 심령 속에 하나님나라가 임한 성도를 의미한다. 그 성도들이 모이는 곳도 교회이다. 두 세사람이 모이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간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되지
못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가르치고, 또 복음을
밖으로 나가서 전파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체계를 세워 공동체를 이끌어
가게 된다.
첫째, 사도는 다스리는 자를 의미한다. 교회 신도들을 잘 관리하는 자가 사도인 것이다. 사도는 거시적으로
복음 전파와 신도를 관리하는 자들이다. 이 사도직은 은사가 주어져서 행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베드로가 사도로 담당하고,
이방인 지역에는 바울이 사도직을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선지자는 예언자를 의미한다. 셋째는 교사다. 교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의미한다. 넷째, 능력을 행하는 자이다. 능력을
행하는 것은 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교회로 이끌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병고치는 은사는 병 고침을 통해서 복음의 전파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
외에 서로 돕는 은사와 다스리는 것과 방언하는 것이 소개된다. 돕는 은사는 교회의 신도들 중에 여러가지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자들이 있으면, 돕는 그런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다스리는 자들은 오늘날 장로직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서 방언하는 것은 방언을 통역하는 것과 연결되어 누군가가 방언을 하면, 통역하는 자를 내세워 신도들이
알아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방언하는 자의 입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모든 신자들이 알게
하는 것이다. 방언은 신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라기 보다, 하나님이
그 신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가 조직화되는 것은 복음이 잘 전파되고, 공동체가 복음으로 하나가 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모여 복음을 잘 전파되도록 상의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것이 성도간의 교제라는 말이다. 교회 건물에 모여서 세상 일을 논의하거나 동아리 모임처럼 잡담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성도들의 권세
고린도전서
6장 2-3절『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제자들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한 마태복음 25장 21절 달란트의 비유에서
마지막 때, 성도들에게 부여된 권위의 정도를 언급하신다.『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바울은 죄사함에 있어서 보다 간접적인 방법으로 잔했다. 사도행전 13장 38-3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아페시스)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썩지 않으므로
너희들에게 이 거룩한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약속대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사실을 믿는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고,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이 복음을 끝까지 믿지 않고 멸시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전한 것이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으로부터 죽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도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율법으로 부터 자유한 자가 된다. 바울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죄의 용서에 대한 말씀을 전했다.
베드로 같은 경우는 죄용서함을 받으라 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제5부. 복음 전파
Ⅰ. 복음 전파의 거점인 교회
1. 교회 공동체의 의미
고린도전서 1장 10절『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δὲ κατηρτισμένοι ἐν τῷ αὐτῷ νοῒ καὶ ἐν τῇ αὐτῇ γνώμῃ.
“같은(엔 토 오토 ἐν τῷ αὐτῷ)
마음(노이 νοῒ)” 이 마음은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사용되었는데,『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누스 νοῦς)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영(프뉴마)이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혼자 마음을 집중해도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같은 마음은 성령으로 연합된 마음이라는 말이다.
“같은
뜻(그노메)” 에서 그노메(γνώμῃ)는 고린도후서 8장 10절에서 시용되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그노멘)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디도가 얼마 전에 받은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기쁨이었다. 디도는 프루슈케 기도를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서 늘 바울에게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성령의
은혜 가운데 집중을 하라고 조언한 바, 얼마전에 디도가 바울에게 자신도 프로슈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와서 바울이 그들에게도 디도가 한 것처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장면이다. 바울이 말하는 나의 뜻은 심령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뜻은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 성도들이 모여서 프로슈케 기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기도하는 공동체이다. 오늘날에는 프로슈케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복신앙에 젖어 세상에서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주류를 이루는데, 어떻게 프로슈케 기도가 되갰는가?
“온전히 합하는 것”(κατηρτισμένοι)에서, 카테르티스메노이는 완성하다, 수리되다 라는 의미로서, 마태복음 21장 16절에서
사용되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카테르티스메노이)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예수님이 맹인과 다리 저는 자를 고쳐주시니,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르는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화를 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젓먹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잘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갈구하는 열망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2. 전도여행과 일곱교회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라 하는 요한은 안디옥교회로부터 선교사로
위임을 받았다. 이 세사람은 구브로섬을 지나 여행을 하면서 대립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마가라는 요한이 버가에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 바울과 바나바는 내륙을 계속 여행하며
갈라디아 지역의 중심 도시들로 들어가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교회들을 세웠다. 사도행전 14장 19절에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어 성
밖으로 끌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
두 선교사는 안디옥에서부터 크게 반원을 그리며 갈라디아 지역의
더베에 당도했다. 바울은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그때까지
세워진 새로운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기에 힘썼다. 이후 그들은 길을
돌이켜 다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바울은 돌팔매질을 당하는 것과 같은 박해로 쫓겨나지 않는 한
새신자들 곁에 머무르며 그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가능한 한 빨리 다시 그들을
방문했다. 심지어 그는 방금 자기에게 돌멩이 세례를 퍼부었던 도시로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바울은 안디옥으로 돌아가 선교 보고를 마친 뒤, 갈라디아 지역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확신시키는 한편, 구원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매달리라고 촉구했다. 왜냐하면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율법과 행위를 혼합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최초의 교회 총회에 참석해 유대인 반대자들
앞에서 이방인 회심자들을 대신하여 변론했다. 그 후에 그는 1차
전도여행 때 전도했던 성도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2차 전도여행을 떠났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는 수리아의 안디옥을 떠나 육로로 갈라디아에 도착해 그곳의 성도들을 격려했다. 그런데 성령께서 북이나 남으로 가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에게해에
접한 드로아로 갔다. 사도행전 16장 9-10절에 의하면, 거기서 바울은 꿈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도움을
청하는 환상을 보고 일행과 함께 유럽으로 떠나기를 힘썼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의 교회들이 2차
여행을 통해 탄생했다.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가르쳤다. 이 시기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과 동행하며 그를 도왔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교회에 들러 인사를 전한 다음,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바울 일행은 2차
여행의 대부분을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그리스(헬라)에서 보냈다. 일부 회심자들은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을 그의 두 번째 나타남으로 여겼고,
또 그가 이 시기에 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 두 통의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매우 강조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서, 바울 일행(바울은 3차
전도여행 기간에 모두 9명과 함께 동행했는데)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굳건하게 한 뒤에 서쪽으로 향하여 에베소에 당도했다. 이 기간 동안에 아시아 모든 지방으로
하나님 말씀이 들어갔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총 3년을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했다. 바울이 활발하게 전도 사역을 하면서 한곳에서 이렇게 오래 머문 적은
없었다. 바울은 마게도냐, 아가야, 그리스 지역을 잠깐 방문했다가 다시 에베소로 돌아갔고,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몇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3차 전도여행 기간 동안 바울은 당시
주요 도시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장로들을 훈련시켜 그 지역의 전도를 그들에게 맡기곤 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아시아에 일곱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요한계시록 2~3장)은
그런 바울의 전략이 효과가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교회를 제외한 여섯 교회를
바울이 직접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 여섯 교회들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바울의 4차 전도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급히 달려와 성전에서 그를 끌어냈다.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바울을 유대교에 반항하는
반동분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1장 31-34절에 의하면, 그들은 바울을 구타하여 죽이려고 했다. 이 일로 군중들 사이에서 약간의 소요가
일었다. 그러자 로마 군대의 천부장은 작은 소란이 폭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병사들을 출동시켜 바울을
긴급 체포했다. 바울은 몇 년 동안 지속된 재판과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살해 위협을 겪으면서 로마에 있는
황제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태우고 로마로 가던 배가 사나운
광풍을 만났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에 의하면, 지중해의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리던 배는 난파하여
시실리 남쪽의 말타(멜리데)섬 연안에 도착했고, 여객들은 안전하게 해변으로 올라왔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에 연금되었지만 방문객들을 접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공식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자유를
누렸다.
이 시기에 바울은 자신의 필요를 돌봐준 성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빌립보서를 썼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고난 중에 있는 수신자들을 위로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오히려
더욱 기뻐하고 감사했다.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쳤다.
바울의 5차 전도여행은
로마제국 서쪽 끝에 있는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와 그레데섬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도를 격려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울은 믿음의 두 아들 디모데와 디도를 격려하기 위해 그레데와 에베소를 방문했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다.
3.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분쟁
바울이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과정에서 균열을 나타내기도 했다. 고린도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두 명이었다. 아볼로와 바울이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심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교회 개척 당시에는 바울이 지도자였다. 반면 후일에 아볼로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더 나아가 1장 12절에서, 각자 자신이 속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네 명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눈으로 보고 배운 지도자들은 둘 밖에 없는데 게바와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그들은 바울이냐 아볼로냐를 놓고
다툰 것이다. 1장 13절에서『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말을 한다. 바울이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역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도 교회 공동체가 수많은 파로 나뉘어져
있다. 위키백과를 인용하여 말하자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운영된 초대교회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권능을 전승하였다고 믿거나 주장하는 공교회 또는 보편교회(catholic
church)에서 시작하여 언어의 차이로 인한 헬라어(그리스어)권역의 동방교회와 라틴어 권역의 서방교회로 구분되었다.
11세기에 공교회의 5개 총대주교 교회 연합이 정치적 대립, 문화적, 신학적 입장 차이(필리오케 논쟁,
성상 논쟁, 상호 파문)로 인하여 깨어져 로마
교회가 4개 교회(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와 연합을 거부해 서방교회과 동방교회로 완전히 나뉘는 교회 대분열이 발생한다. 이후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교구 연방형태로 발전하였고, 서방교회는 5백년 동안 로마를 중심으로 교황이 관할하는 로마교구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서방교회는 16세기에 들어 교회내 부패와 비기독교적 요소의 만연, 인문주의를 배경으로 교회 갱신 운동이 전개되면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로마가톨릭교회와 독일 루터파교회를 시작으로
개혁교회(장로교회), 영국국교회, 감리교회 등으로 다양한 개신교회로 발전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의 신학에 맞게 교리를 만들어서 조직신할이라는
이름으로 신학대학에서 가르치고 그 곳에서 배출된 전도사나 목사들이 그 교리대로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제대로 잔승되었을까 하는 질문에는 부벙적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흐비리어나 헬라어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지 않고, 한글 개역개정의
번역도 히브리서 구약성경과 헬러나 신약성경과 많은 차이가 있는데다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거나
또는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서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아진 것이다. 진리가 비진리로 변질되었을
때, 비진리를 선포하는 교회는 이름만 교회이지, 초대교회
당시 교회 공동체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잘 살펴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4. 교회 밖에서의 도전
초대 교회 당시 교회 밖에서의 도전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이다.
첫째, 인본주의에 대한
말씀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본주의란 인간 존재의 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단지 인간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상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인본주의 사상에 물든 기독교인들은 로마서 8장 1-2절의 말씀을 현재와 미래의 것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과거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십자가의
보혈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자기를
내세워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생각하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 죄이고,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인식이 팽만하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고 선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은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계명을 어김으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났고, 사람들은 이제 에덴동산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본주의에 물든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바, 죄를 짓지 않는 노력은 선한 사람(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한 마음으로 여러 활동을 하게 되고, 선하게 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지만, 이제는 앞으로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선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과거에 있었지만, 현재와 미래는
모든 선하게 되는 노력이 십자가의 사랑과 다른 종교의 자비와 다를 게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인본주의에 빠진 기독교인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선으로 갈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연합 만이 하나님 사랑, 거룩에 이르는 것이다. 오늘날 인본주의에 빠진 기독교인들은 죄에 대한 두가지의 잘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둘째, 율법주의에 대한
말씀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했으나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너희들은
모두 죄인들인데, 율법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희생제사를
통해서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율법
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죄인들은 동물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뿌렸다. 제사장은 죄인으로부터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고, 죄인을 대신해서 동물이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동물이 다름 아닌 죄인이라는 것이다. 비록 대신 동물이
죽지만, 죄인과 동물이 연합되어, 죄인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사를 통해서 다시 태어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새 창조에 속한다. 히브리서 9장 11절에서 이 세상의 창조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율법은 엄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율법) 속에
생명나무(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죄는
그 열매를 먹는 것 이전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나무를 통해서 그
탐욕의 마음이 있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죄가 아니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주의는 그리스도를 제거한 사상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만연한 율법주의(인본주의) 사상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게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 속에서 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계명에 얽매여 그것을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규정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또한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침을 내리는 듯한 말도 다
율법주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목사들은 자기를 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인간들은 죄인들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로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치는 사도바울의 말을 기억하지 않으면, 율법주의(인본주의)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는 자들의 모습은 행동을 강조한다. 야고보가 말하는 규정을 들어서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받아드리면, 행동으로 율법주의를 벗어나야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셋째, 영지주의에 대한
말씀이다.
영지주의는 그노시즘(영어로는
나스티시즘)이고 불리운다. 그노시스는 헬라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높은 지식, 또는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영지라는
말은 영적 지식을 의미하며, 그래서 우리말 번역은 영지주의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 사전을
보면『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 즉 영이 물질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한다』고 말하고 있다.
영지주의의 근본적 사상은 인간에게 신성이 있는데, 물질인
육체에 영이 갇혀있어 신성이 감추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를 통해서 신성을
회복하여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어떤 하나의 형태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견해가 다양하다. 어쩌면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영지주의의 한 분파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 이런
사상이 들어왔다면 아마도 놀라울 것이다.
교회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이 예수의 피를 통해서 모든 죄를 사해주시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이 될 수 있는 신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기독교인들 중 열심히 신앙생활 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형상을 신이 될 수 있는 신성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다면 영지주의를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오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남을 믿는 것인데, 예수 이름만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성령도 선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죽지도 않으면서,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술쟁이 시몬이 돈을 주고 성령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심지어 오늘날은 많은 교회에서 성령체험이니 은사를 강조한다.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그
사람이 신성을 가진 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은사에 대해서, 하나님의 예언 능력을 받았다고 하며, 다른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예언을 하거나, 국가나 사회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기도 한다. 신비한 말(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여 병도 낫게 해주고, 이 땅에서도
복을 받아서 잘되게 해 달라고 빌고 있으며, 혹시라도 문제가 해결되면 신통한 능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감추어진 신성을 깨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이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에게 허용하신 것인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신성(하나님의 형상)을 깨우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를 추구하는 종교들은 대부분 사상이 같다. 마음
속에 있는 신성을 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노력으로 그것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통합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경(로마서 1장)은 인간의 마음에 신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탐욕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마음의 탐욕이 바로 자기라는 옛사람이다. 열심히 거룩한 생활을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옛사람이 죽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을 배경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왜 마음의 탐욕이 기독교에서는 죄인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자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파
1. 바울이 강론한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19장 8절『『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19장에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핵심 사역인 에베소 개척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약 3년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이 기간은 바울의 선교 사역이 꽃을 피운 기간이었다.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다. 그랬을
때 온 아시아 사람들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다 복음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마술
책을 불태우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바울이 강론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내용인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전후의
이야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첫째는 성령세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도행전 19장 1-2절에서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어떤 제자들은 아볼로의 제자들이다. 바울이 성령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었는데,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볼로는 성령에 대해서 알고, 다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제자들은 왜 성령에 대해서 모르는가?
기독교의 핵심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신앙이다. 그런데, 성령을 모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아볼로가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성령에 대해서도 듣지도 못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의 많은 교역자와 신자들이 이와 같을
것이다.
19장 4-5절『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예수의 이름 안에서 주시는 세례를 성령세례라고 한다. 요한이 주는 물세례는 죄를 씻는
개념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바 로마서 6장 3-7절에서 말하는 물세례는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이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
성령세례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으로 새생명 가운데 있게 하는 것이다. 부활생명이 없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도가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께서
그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가 임재(파루시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는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하는
기도가 프로슈케 기도라고 한다.
그런데, 19장 9절에서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비방하는 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인 것이다. 그
당시 율법주의는 복음 전파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율법주의에 대한 차이를 설명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2. 복음 전파 내용인 하나님
나라
오늘날 성도가 전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은 바로 심령 속의 천국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기까이 왔다고 선언하시는 그 하나님 나라가 바로 천국이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
부활함을 믿고, 그를 통해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이루는 것이 바로 열매가 되는 것이다. 씨를 뿌려 열매를 맺듯이 씨를 뿌리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고 예수믿으면 천국갑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은 바론 복음 전파가 아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구분을 해야한다. 헬라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 왕국이라 번역했는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개역개정은 천국이라고 번역했다. 천국은 한자어로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 왕국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는데,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하늘 왕국이 가까이 온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가까이 온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이키는 자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사없는 단수 우라논은 눈으로
보는 하늘이다. 관사가 없는 복수 하늘은 세상의 교회를 의미한다. 관사가
있는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고, 관사가 있는 복수하늘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이 그들의 옷을 벗고, 영이 훍에 갇히므로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 갇힌 존재이다. 그래서 두번을
죽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히브리어 성경은 죽고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다.
두번 죽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거듭난다고 표현했는데, 이전의 것은 죽고(두번)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다. 두번 죽음에 대해서, 첫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물세례), 두번째 죽음은 혼에 대한 죽음(불세례)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고, 혼이라는 더러운 옷을 벗는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 즉 모든
인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셔서 너희들은 죽어야 할 존재하는 것을 알려주셨다.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에서『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6장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혼의 죽음은 불세례로서 육체로 비롯된 혼(첫사람 아담)의 죽음이다. 육의 몸에서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1-12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삼일이라는 숫자가 있다. 삼일은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예수와 함께 죽은 성도는
그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은 육의 몸에서 영의 몸(새로운
혼)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승천은 성도가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전은
곧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이 바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시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보좌 우편에 있는 것이다.
재림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며, 헬라어로 파루시안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교회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자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만나서 천국
혼인 잔치를 하는 것이다.
Ⅲ. 기독교 교리
1. 교리의 원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죄인 역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부활도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는 성도는 현재적으로 하늘 생명으로 부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빠지면
올바른 교리가 아닌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례로 표시되며,
물세례(죄에 대해서 죽음)와 불세례(혼에 대한 죽음)를 통하여 죄인이 죽었음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세례로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영의 몸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데, 이것을
새성전이라 한다.
새성전이 세워지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성도와
하나님이 천국에서 혼인잔치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성도는 하나가 된다. 성부, 그리스도, 성자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삼위일체가 되는 것이다.
2. 목회자 교리
바울의 각 서신은 다양한 목회 지침을 제시하면서
각각의 독특한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여러 시각과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점은 교회와 목회의 본질과 방향이다. 교회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목표와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다루는 측면이다. 이것은 목회의 본질과 방향에 직결된다. 바울서신 이곳저곳에서 이와
관련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도 로마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에베소서에서 교회와 목회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바울의 분명한 생각과 시각을 찾을 수 있다.
이 세 서신은 교회 목회와 관련하여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세 서신 모두 바울이 교회 목회에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하기보다 간접적이고 보조적인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가보지 않은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고, 골로새서는 주로 다른 사람의 사역으로 (예컨대, 에바브라의 주도적 사역으로) 이루어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며, 에베소서는 여러 교회에 회람할 의도로
쓴 편지이다. 세 서신의 이런 간접적이고 보조적인
성격은 각 교회에게 교회의 본질과 목표, 방향을 체계적으로 알려주어야 할 목회적 필요와 연결된 것이다.
둘째는 세 서신 모두 이론적 설명이 각 서신 전반부에 등장하고, 그에 따른 구체적 권면이 후반부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론적 설명과
구체적 권면이 로마서에서는 1:18-11:36과 12:1-15:13에
등장하고, 골로새서는 1:3-2:5과 2:6-4:6에 나타나며, 에베소서에서는 1:3-3:21과 4:1-6:20에 기술된다. 이렇게 이론과 권면으로 엮어진 구성 형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규명함으로 마땅히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의도와 연결하고 있다.
(1)로마 교회와 목회의 본질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서신이다. 바울은 당시 널리 퍼져있는 왜곡된 유대 율법주의의 영향을 염두에 두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서는 유대주의자와의 논쟁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가 신학적 논쟁만은 아니다.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지만, 한편으로는 로마교회가 그 논쟁에서 승리하여
바람직한 교회 공동체가 되어가기를 바라는 목회적 의도가 있다. 로마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이해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공동체, 즉 바람직한 교회로 자라가기를 원하는 목회자의 심정이 로마서에
깔려 있다.
이런 의도 때문에 바울은 먼저 새 공동체(새 이스라엘, 새 인류)를
창조해내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참조 1:3-4; 1:9) 무엇인지 1:18-11:36에서 길게 설명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게
된 공동체, 즉 로마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를
12:1-15:13에서 구체적으로 권면한다.
이처럼 로마서는 복음을 가르침으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며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권면하려는 바울의 뜻을 잘 보여준다. 로마서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사람 공동체이며, 목회의 본질은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공동체(영적
이스라엘)를 세우는 활동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생각한 교회와
목회의 본질을 잘 반영한 서신이고, 따라서 독자는 로마서에서 교회와 목회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예수로 말미암는 새 공동체, 영적 이스라엘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2) 에베소서, 골로새
교회와 목회의 목표와 방향
두 서신 모두 시작부터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그 뜻의 실현이 거룩한 교회로 나타나는 것임을 밝히고(엡 1:3-3:21; 골 1:3-2:5), 그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엡 4:1-6:20; 골 2:6-4:6).
이런 과정에서 두 서신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 실현을 묘사한다. 두 서신 모두 전반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거룩한 교회로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고, 후반부는 인간의 관점에서 그 거룩한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권면한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점을 매우 체계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영적 이스라엘)을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인치심으로 말미암아 실현된다(엡 1:3-14). 그 실현의 결과는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케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인데(엡 1:22-23), 그
교회는 개별적 측면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며(엡 2:1-10), 공동체적 측면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로 연합하여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엡 2:11-22).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바라는 목회 기도를
한다(엡 1:15-23; 3:1-21). 그 바람은 결국
바람직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권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4-6장). 먼저
거룩한 교회가 지녀야 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원리적으로 제시하고(엡
4:1-24), 이어 구체적으로 풀어 권면한다(엡
4:25-6:20).
골로새서도 기본적 틀에서는 에베소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아 새롭게 창조되는 새사람을 말하면서(골1:13-20), 그것이 골로새 교회에 실현됨을 선언한다(골 1:21-23). 이것이 그리스도로 새사람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이다(골 1:1, 9). 바울은 그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바라는 목회 사역을 감당하며(골 1:24-2:5), 이런 목회 사역의 권면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풀어간다(2:5-4:6).
교회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골 2:6-8), 그 자세한 내용을 소극적 측면(2:16-23)과 적극적
측면에서(3:1-4:6)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두 서신 모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됨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며, 그 하나님의 뜻이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두 서신은 바울 목회의 목표와 방향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사람, 즉 거룩한 교회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이고, 그것을 이루는 방향으로 목회가 진행되어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거룩한 공동체 실현이라는 목회의 목표를 말하면서 목회가 이루어져야 하는 마땅한 방향을 말하고 있다.
(3) 디모데 전후서에서 나타난
목회자 방향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앞에서 다룬 서신들이
보여주는 목회의 특징과는 좀 다른 면을 보여준다. 로마서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목회의 본질과 방향을
말하고 있고, 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후서가
교회의 구체적 문제와 목회의 실제적 처방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디모데전서는 정리되고 일반화된 목회
방식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
이런 관심은 네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다.
첫째, 이
두 서신은 바울이 직접 목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목회를 보여준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와 그레데섬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적절한 목회의 모습을 가르치고 있다(딤전1:3; 딛 1:5). 따라서
목회 현장에 있는 세부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적기보다 목회하는 방침을 제시하는데 치중한다.
둘째, 이
서신들은 교회 정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딤전 3:1-13; 딛 1:5-9). 두 서신 모두 디모데나 디도 자신의 역할 뿐 아니라, 함께
목회 지도력을 행사할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디모데나 디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중요하고, 이들이 교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목회 지도력이 교회 정치라는 틀로 나타나는 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다.
셋째, 교회
조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다. 바울은 디모데나 디도가 목회 지도자들을 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고
그들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딤전 3:1-7, 8-13;
5:22; 딛 1:5, 6-9). 장로(감독)와 집사의 역할과 임직 기준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두 서신은 교회 목회가 어떤 조직적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넷째, 두
서신은 가르침의 전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두 서신이 가르침의 내용에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서신은 특별히 교인들을 가르치는 방식과 전략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한편으로는 문제의 사람들을 잘 막는 방법을 설명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을 전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4) 디도서에서 나타난 목회자의
방향
디도서는 바울의 목회 방식을 디도에게 전수하는 서신이다.
디도서도 디모데전서처럼 바울이 전달하는 목회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디모데전서가 목회 훈수라면, 디도서는 목회 전수라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사역해야 하는 디도에게 어떻게 목회해야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전수하고자 한다.
디모데전서가 에베소교회에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어떻게 목회하는가를
돕고자 했다면, 디도서는 그레데 섬에서 디도가 어떻게 목회하여야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전수하고자 한다(딛 1:5). 따라서 디도서는 디모데전서에 비해 바울이 가르치는 목회의
조감도를 보다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목회의 조감도는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바울은 가르침을
목회 방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으로 강조하고 있다. 디도서는 사실 전체적으로 가르침의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지 본론의 대부분은 가르침의 문제를 다루고(딛 1:10-3:7), 편지의 뒷부분은 다시 그 가르침의 주제를 반복하여 정리한다(딛 3:8-11). 바울이 전수하려는 목회에 있어 가르침의
문제는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바울이 전수하려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가르침이다.
둘째, 바울은 그
가르침이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잘못된 가르침을 막아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바른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극적
측면에서는 잘못 가르치는 사람을 막아야 하고(딛 1:10-16), 적극적으로는
진리에 합당한 바른 가르침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전해야 한다(2:1-3:7). 바울은 후자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함께 가야 한다. 가르침의
목회는 양면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 이러한 가르침의
목회는 복수지도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가르침의 목회를 전수하지만, 그것은 디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디도와 함께 할 지도자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 처음부터 그레데 섬 각 성에 함께 할 장로들(목회자들)을 세우라고 지도한다(딛 1:5).
그 장로들은 엄격히 세워져야 하며(1:6-9), 그들이 해야 할 최고의 책임은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이다. 그들과 함께 디도는 잘못 가르치는 그룹을 막고 바른 가르침에 힘써야 한다(딛 1:9). 복수의 목회자로 이루어지는 복수지도력은 바울이 디도에게
전수하는 목회의 기본 조직이자 패턴이다.
이처럼 디도서는 바울이 전수하고자 하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점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제시한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가르침의
목회에 힘쓰라는 것이고, 복수의 목회자(장로)와 동역하라는 것이다. 바울이 전수하는 목회를 한 마디로 하자면 복수지도력으로
바른 가르침에 힘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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